IMF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을까?? 갚아야 할 외채는 1,500억 달러인데 한국이 가진 달러는 40억 달러도 없었습니다. ‘IMF 사태’로 인해 김영삼 대통령은 지지율이 6%까지 떨어지게 되며 국민들에게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 한 명 때문에 온 국민이 힘든 시기를 겪어야만 했었을까.
중국의 그날
먼저 중국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992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덩샤오핑은 권력 승계를 무난하게 가져가기 위해 후계자를 미리 지정합니다. 차기 후계자로 장쩌민을 지명합니다. 원래 후계자로 생각했던 건 장쩌민이 아닌 리펑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앞으로 돌려서 보면 1989년 6월 4일, 유혈 사태가 일어납니다. 민주화 시위를 하던 대학생과 시민들을 리펑이 탱크를 동원해서, 유혈 진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천안문 사태’라고 부릅니다. 리펑은 천안문에서 피를 묻히게 되면서, 중국 사람들에겐 '학살자'로 불리고, 서구에서는 '베이징의 도살자'로 불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리펑은 개방개혁의 얼굴로 외부로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반면 장쩌민은 천안문 사태의 피가 묻지 않았기에 때문에 후계자로 세울 수 있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인자로 리펑이 총리를 맡아 실권을 행사하는 구도로 만들었습니다.
1993년 3월 27일,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은, 국가 주석이 되고 본인의 파벌이 있던 ‘상하이방’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인 ‘선부론’ 내세웠습니다. '선부론'은 일부가 먼저 부유해진 뒤 이를 아래로 확산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렇게 상하이 등 남부 해안 도시들에게 자원을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방향으로 수출을 확대하며 지역경제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당시 중국은 동남아 국가들과 가격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수출을 확대하는 목적으로 1994년 1월, 중국은 환율을 크게 건드리게 됩니다. 1달러당 5.8위안이었던 위안화를, 8.7위안으로, 49.8%나 절하 시켜버립니다. 이 말은 곧 중국 제품의 가격이 40% 이상 싸지며, 가격경쟁력이 생겼다는 걸 말합니다. 중국과 가격 경쟁을 하던 동남아 국가들은 바로 그 해부터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섭니다.
태국의 그날
그렇다면 동남아 국가인 태국의 당시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아시아 외환위기의 최초의 원인은 태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태국은 바트화를 달러화에 고정시켜 놓은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태국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0년에서 1996년까지만 해도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낮은 물가, 견고한 재정 흑자, 높은 저축률 등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외국자본이 물밀듯 들어오다 보니 외채에 의존해 설비투자를 하고, 사업을 확장해 가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태국 은행들은 무분별한 대출을 남발했고 이는 고스란히 빚으로 쌓여갔습니다.
그러던 와중 중국이 위안화를 5.8 위안에서 8.7 위안으로, 환율을 건드린 겁니다. 태국의 무역 수지는 적자가 되며, 태국 내 달러가 말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나마 얼마 없는 달러를 환율 방어에 소모하는 실수를 합니다.
일본의 그날
이번엔 일본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플라자 합의'로 인해서 엔화가 강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엔고가 너무 심하니 수출로 답이 안 나오자 일본은 내수를 성장시키는 것과 해외투자 확대라는 결정을 합니다.
일본은 태국 등 동남아 기업들의 해외투자를 집중했고 해가 갈수록 투자를 확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4년 1월, 중국이 환율을 건드렸고, 동남아 국가들은 수출이 어려워지며 경상수지 적자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95년 1월, 일본 사상 최대 규모인 '고베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당시 일본의 보험사들은 보험 가입자들에게서 받은 보험료를 조금이라도 더 불리기 위해서 높은 금리를 주는 해외로 투자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고베 대지진이 일어나며 상당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보험사들이 달러를 팔고 엔화로 바꿔 들어오니 엔화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일본의 수출은 전례 없던 고전을 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1995년 4월 G7에 엔저를 유도하는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를 '역플라자 합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엔화는 '역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당 70엔 대에서 100엔 수준까지 급격한 약세로 전환이 됩니다.
한국의 그날
이번에는 한국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군인이 아닌 첫 문민 대통령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군사 정부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지면 안 된다는 나름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김영삼 정부는 경제를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 이었습니다. 수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당시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이 가진 문제를 제기했지만 모두 군사정권 적폐 잔당의 정치적 공세라며 무시했습니다.
여러 경제적 실책이 있었지만, 최악의 수를 두게 됩니다. 1993년, 금융선진화라는 명목으로 지방의 24개 단자회사를 종합금융회사로 전환하는데 당시 6개 종금사만 있던 시장에 24개 종금사가 추가되면서 한국에는 30개의 종금사가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을 시작하게 됩니다. 정부는 종금사 돕기 위해 종금사도 외화대출이 가능하도록 허가를 하자, 종금사는 2%대 저금리 해외자금을 빌려와서 한국의 기업에게 8%대로 대출을 합니다. 당시 제1 금융기관의 금리가 10~15%였으므로 8%는 기업 입장에서 싼 이자였습니다.
그리고 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돈을 빌릴 때 대출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 낮은 이자로 빌려올 수 있다 보니 수익을 더 높이려고 1년 이내의 단기 외채를 선호했고 만기가 되면 주먹구구식으로 연장을 하며 버텼습니다. 어느새 종금사들이 해외에서 빌려온 돈에 75%가 만기 1년 이내에 단기자금이 되었습니다. 저금리로 외채를 빌려 고금리로 빌려주며 돈놀이를 하던 종금사들은 서로 간의 대출 경쟁이 심해지게 되면서 우량 기업을 상대로 한 대출의 경우 금리가 점점 떨어지게 되고 종금사들은 기업 이윤이 박해지며, 경영 압박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태국과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으로 진출하며 국내와 똑같은 방식인 이자놀이 대출 영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날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1994년 1월, 중국의 환율 조작, 1995년 4월, 일본의 역플라자 합의. 중국의 '위안화'와 일본의 '엔화'가 동시에 약세를 보이며 이와 경쟁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은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동남아 국가들의 경상수지 적자에 놀란 글로벌 자금들은 서둘러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헤지펀드들은 태국으로 몰려가 태국의 바트화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상수지 적자로 안 그래도 달러가 부족해 죽겠는데 달러를 환율 방어에 소모하던 태국 정부는 1997년 7월 2일 예고 없이 고정환율제를 폐지했고 이로 인하여 바트화의 가치는 순식간에 30%나 폭락하며 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합니다. 태국의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 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외환위기로 번지기 시작하죠.
당시 동남아 투자가 많았던 일본 TOP3 증권사인 '야마이치 증권',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이었던 '타쿠 쇼쿠 은행' 등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파산하기 시작합니다. 일본 금융감독국은 금융 회사들에게 '자기자본비율(BIS)'을 늘리라고 강요를 했고, 갑자기 자본을 늘릴 수 없던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합니다. 기존 대출의 만기가 도래하는 대로 바로 회수를 하였는데, 만기가 짧았던 한국 종금사가 가장 먼저 타격을 입게 됩니다. 당시 종금사는 '동남아'에 빌려준 돈을 떼이고 일본에게는 원금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 그동안 대출 만기 연장을 해오던 '종금사'는, 일본이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자 한국 기업에 장기로 대출해 준 돈을 회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국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이 300~500% 수준의 차입경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금사의 전면적인 대출 회수에 대기업들은 결국 하나씩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 있던 해외자금은 모두 달러로 환전해서 빠져나갔습니다.. 한국 역시 태국처럼 헤지 펀드들의 공격을 방어했지만 달러가 부족하여 결국 '환율 방어'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환율이 박살 나면서, 갚아야 할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달러당 800원이었던 환율은 1,960원으로 바뀌면서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가 순식간에 2배가 넘게 됩니다.
국가 부도의 날
이렇게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 '국가 부도의 날'이 시작됩니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난 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30대 대기업 중 17개가 망하고 은행 26개 중 16개가 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빚을 내는 데 소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설비투자를 쉽게 늘리지 못하고 설비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신규 고용이 창출되기 어렵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실업자가 늘어나며 일자리도 구하기는 어려워집니다. 물론 1999년~2000년에 미국의 닷컴 버블과 함께 국내에도 벤처기업 붐이 일어났었지만 또 한 번 급격히 무너져 내리면서 기업의 설비투자는 더욱 위축되었어요.
우리나라는 그렇게 성장률과 경기가 둔화되어 갑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한국은행은 저금리로 가면서 많은 유동성을 공급하고자 했지만 기업들의 대출 수요는 크게 줄어들었고, 잘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업들이 대출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은행이 성장을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연스레 다른 수요처를 찾게 되는데 대출을 받는 주체가 '기업'에서 '가계' 쪽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기업이 대출을 하면, 설비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자리도 창출되고, 자연스레 소비 활동이 늘어나면서, 기업의 생산을 자극하고, 기업은 또 설비 투자를 늘리면서, '선순환'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IMF 이후, 은행의 대출이, 가계와 부동산을 향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저성장,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가계 부채율, 부동산 가격 상승 등,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은 외환위기 때 생긴 상흔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업들의 경영윤리의식 부족, 문어발식 기업 확장 등 내부적인 요인에만 국한되어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였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글로벌 환경변화에 따라 우리의 경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현재에도 같다고 봐야 합니다. 전 세계가 경제 불황이라는 문을 열고 있는 상황에 ‘제2의 경제 대공황’이 찾아올 것이란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